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.25 전쟁/미군 참전과 역할 (문단 편집) == 미 군수지원부대의 전개와 활동 ==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다.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,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다.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 → 부산군수사령부 → 미8군 후방사령부 → 후방사령부(본토) 체계였다. 미 제8군은 부산군수사령부를 통하여 예하 부대 및 한국군에 대한 군수지원, 보급품 조달, 수송, 항구운영, 보관, 분배임무 이외에도 후방사령부를 통해 일본 점령임무도 책임지고 있었다.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19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다. 그러나 1950년 9월 19일 부산군수사령부는 전투부대가 늘어나 군수지원의 요소도 늘어나게 되어 C형 군수부대(4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)인 제2군수사령부로 확대 개편되었다. 같은 시기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편성된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3군수사령부를 인천에 설치하였다. 그러다 이게 꼬여서 원산상륙작전때는 3군수사령부는 미 8군을 지원하고 오히려 2군수사령부가 원산으로 상륙하는 미 10군단을 지원하게 되었다. 그러다가 맥아더의 직속 부대인 미 10군단이 미 8군과 별도로 노는 괴랄한 사태가 벌어져 중공군 개입당시 패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결국 그 책임을 지고, 결국 미 10군단이 맥아더 직속에서 미 8군 예하로 들어오고, 3군수 사령부 역시 2군수 사령부 예하로 들어가 흡수 통합된다. 1952년 7월 10일에는 미 8군이 전방작전에만 전념하기 위해 한국병참지구사령부(KCOMZ)를 설치하여 북위 37도 이남의 후방지역에 대한 책임과 미 8군의 군수지원을 맡게 되었다. 예하로는 실질적인 군수지원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군수기지국(KBS)을 설치하였다. 한국병참지구사령부는 동년 10월 1일부터 미 육군 극동군 사령부가 일본 점령임무를 맡게되자 미 8군 소속에서 미육군극동군 사령부 산하로 예속변경되었다. 주일군수사령부 역시 같은 시기에 미육군극동군 사령부에 흡수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